#01
#02
#03
#04
#05
#06
#07
#08
#09
#10
#11
1979년 9월 29일 충청북도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한 사람인 손병희가 태어나 자란 곳이다.
생가는 정면 4칸, 측면 1칸반의 초가집으로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1962년에는 탄신 100주년을 맞아 충북문화재보존협회가 그의 생가 근처에 유허비를 건립하고
주위 200㎡에 보호책과 측백나무 울타리를 하여 정리하였다.
손병희는 동학(東學)에 입문하여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10만의 도중(徒衆)을 이끌고 관군(官軍)과 싸웠으며
1897년에는 천도교(天道敎) 3세 교주(敎主)가 되었다.
1919년 기독교, 불교 대표들과 함께 3·1운동을 영도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옛 서울구치소)에서 복역 중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하다가 병사하였다.